비거니즘( veganism, 다양한 이유로 동물 착취에 반대하는 철학 및 사상)이 주목받는 시대다. 사람들은 변하고 있지만 전국적으로 정책적 변화는 미미하다. 지방은 도시에 비해 더욱 그렇다. 제주도는 오히려 이같은 흐름에 역행하는 모습도 보였다. 지난해 퇴역경주마를 도축해 반려동물의 사료로 사용하는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 반발로 사업을 철회했다.
다만, 다른 편에서는 작은 변화도 일고 있다. 제주에서는 지난 3월 '제주도교육청 학교 채식급식 활성화에 관한 조례'가 제정돼 시행됐다. 이에 따라 채식 급식이 필요한 학생에게 이름에 걸맞는 급식을 제공해야 한다. 도내 교육감도 월 1회 채식급식의 날을 지정 운영할 수 있게 됐다.
김란영 ㈔생명환경권행동 제주비건 대표는 이같은 변화를 이끈 중심에 있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퇴역경주마를 도축하는 현실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서 '도축장 가는 길'을 11차례 걸어나갔다.
지난해부터 꾸린 '기후위기 대응.채식 활성화를 위한 제주도민연대' 활동의 일환으로 도내 채식급식 문화 활성화를 위해 도내 학교에서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제주투데이는 2022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김 대표를 지난 26일 제주시내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질문하는 족족 거침없이 답변해 나갔다. 평소에 문제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태도다. 안경 사이로 비치는 그의 눈빛은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꺼지지 않는 불꽃 같았다.
채식급식 교육 : 앎의 힘은 미래를 바꾼다
- 올해의 인물에 선정된 소감은.
"'올해의 인물'이라는 단어 자체가 좋은 성과를 낸 사람에게 주어져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물론 열심히 여러 활동을 하긴 했지만 아쉬운 부분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래도 좋게 봐주셔서 영광스럽다."
- 올 한해 활동이 눈에 띄었다. 월 1회 채식급식 사업을 추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는데.
"채식 선택권을 일부 보장하는 부분에서는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더 많다. 통과된 채식급식조례에 저희가 원하는 내용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해서다. 주 1회를 바랐다. 한 달에 한 번은 사실 미약하다고 생각해 모두 비건메뉴로 구성되길 바랐지만 락토오보(lacto‑ovo, 유제품과 달걀 허용하는 채식) 수준에 그쳤더라."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적용되고 있을 때 변화를 느끼나.
"그렇다. 특히 교육 면에서는 '우리가 어마어마한 씨앗을 심고 있구나' 실감하게 된다. 제주는 좁은 지역사회이다보니 평가들이 들리는데, 대부분 긍정적이다. 아이들이 작성한 설문지에는 '더이상 고기를 못 먹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쓰여있다. 15년 전 채식을 시작한 저도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주변에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을 탓하기도 했다. 이제는 어릴 때부터 알고 있는 아이들이 나중에 싹을 틔울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 학부모들의 반발은 없었나. '고기'를 먹지 않으면 아이들 성장에 방해가 된다는 관념이 아직 있다.
"물론 있긴 하다. 하지만 고작 한 달에 한 번이다. 언론에서 지나치게 부각하는 면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교육을 받아본 학부모의 경우에는 채식이 정말 필요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다. 실제로 외도초 교육 후 SNS 메신저로 채식레시피를 배우고 싶다는 학부모들의 요청이 있어, 워크샵을 열기도 했다. 또 학부모들은 미래에 아이들이 살아갈 기후위기 시대에 고민이 많다. 채식은 그에 대응하기 위한 하나의 행동이지 않나. 교육 전후 반응 차이가 크다."
김 대표는 우리가 채식에 대해 경계심을 갖는 이유는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장 매일 채소로만 식탁을 꾸리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끼, 하루에 한 끼 등 매일 작은 변화를 시도해나가는 것은 문제를 알고 있어야만 할 수 있다. 이는 훗날 거대한 변화를 일으킬지 모른다. 그가 2018년부터 매해 '비건 페스티벌'을 여는 이유이기도 하다.
퇴역경주마를 위한 행진
- 우리나라 전반적으로 봤을 때 비건 커뮤니티가 서울에만 중점적으로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도내 비건 활동에 큰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통 모든 분야의 커뮤니티가 서울에 몰려있다(웃음). 그나마 제주는 공간.문화적으로 비건문화를 확산시키기에 쉬운 환경이긴 하다. 하지만 서울은 양돈장이나 도축장 등이 있는 환경은 아니지 않나. 도시가 아닌 곳에 비건문화가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건 결국 공장식 축산이다. 고착화된 육식을 제주의 전통문화로 착각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더라. 이같은 현장에서 더 나은 것을 모색하기에는 쉽지 않긴 하다. 가끔 도시가 부러울 때도 있다. 최일선에서 바꾸려는 게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다."
- 최근 마무리 된 '도축장 가는 길' 행진도 힘든 일 중 하나였겠다.
"당시 '경주 퇴역마 펫사료 제품개발 연구용역'에 대한 최종보고서가 나왔다. 조용히 있었다면 공장 설립이 실현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도내 여러 시민사회단체 및 전국 동물권 단체와 함께 연대 성명을 냈다. 하지만 이렇게만 그칠 사안이 아니다 싶었다. 목숨걸고 막아내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에 급히 기획해 추진했다."
- 실제로 공장 설립 계획이 취소됐다.
"당시 퇴역경주마들을 가장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고, 공사 관련 예산도 확보한 상황이었다. 도에서는 '예산이 없어서 안 할 계획이었다'고 얘기하긴 했다. 하지만 갑자기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하다보니 내심 놀랐던 것 같다. 하지만 실질적 제도가 개선된건 없다. 표면적으로 조금 나아졌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 앞으로도 퇴역경주마 보호를 위해 행동해나갈 것인가.
"이건 포기할 수 없는 사안이다. 전국 말산업 특구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하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제주는 말의 고장이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학살터다. 내년에는 시민들에게 현실을 알리기 위한 대국민 캠페인을 기획하고 있다. 다만, 캠페인에서 그치면 안된다는 생각이다. 동물을 이용한 경제구조를 어떻게 변화시켜나갈지 고민하고 있다.
- 올해 화살을 맞거나, 입.발이 묶인 강아지 등 동물학대 사건도 유난히 많았다.
"알려진 사례는 일부고 실제로는 더 많다. 사회가 용인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본다."
- 본인이 생각하는 도내에서 가장 시급한 동물 관련 문제.
"불법 개농장."
- 이유는.
"유기동물 등 문제도 심각하지만 불법개농장 문제가 가장 답답하다. 해결되지 않으면 비건문화도 제대로 확산시키기 어려운 문제다. 지난해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개식용 문제 논의를 위한 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이는 '논의'해야 할 사항이 아닌데 국가는 왜 논의 구조로 가져가는지 의아하다. 축산물위생법이나 동물보호법에는 '개고기'를 폐기물.음식물 쓰레기로 보는 것 자체가 불법적 요소다. 법률 상 개가 고기가 되는 것을 허용하는 자체가 위법행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묵인하고 있다는 게 말이 안된다. 이건 의지의 문제다. 개농장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다.
- 도는 대응책으로 최근 민.관.학 '동물보호 및 복지정책 자문단'을 확대했다. '개농장 합동점검단'을 구성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나.
"모두 의미있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전자는 다소 포괄적이고 모든 것을 담아내기 힘들다. 오히려 동물학대 예방을 위한 구체적인 조직이 꾸려져야 한다. 그래야 가장 시급한 문제에 대해서 논의를 집중적으로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후자는 점검을 가기 전에 사전에 예고하는 상황이다. 학대 현장을 발견하기 쉽지 않은 방식이다. 특히 공무원은 일하는 시간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많은 곳을 돌아다녀볼 수도 없다. 적발해도 과태료 정도다. 이렇게 해서는 변할 수 없는데 도는 이런 부분들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시민사회단체와 연계, 협동하면 더 좋은 방법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 비건활동가들은 번아웃 위험이 크다고 들었다. 관리하는 방법이 따로 있나.
"아직 주저앉을 나이는 아니다. (웃음) 다만, 청년들이 활동하는 과정에서 회의감에 빠지거나, 좌절하는 것을 종종 봐서 안타까울 때가 있다. 동물권은 나아지는 속도가 느리다. 지옥같은 상황을 많이 접하다보니 일상생활을 할 때 편안히 사는 것 자체가 죄스러운 순간도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 계속 활동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변화해야만 하니까, 지금 이 순간도 동물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니까. 이를 자각하고 나면 침묵하기 쉽지 않다.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지속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1993년 제주대 총여학생회장 시절 여성인권운동에 앞장섰다고 들었다. 동물권에 집중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여전히 관심은 있다. 동물권.생명권에 대한 문제를 풀어가게 되면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정리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타자를 배려하고 도움을 줘야한다는 태도가 생긴다. 비인간 동물은 사회시스템 내에서 최약자다. 하지만 인간도 결국 동물의 범주에 있다."
- 앞으로 기대하고 있는 일은.
"제주도 이른바 MZ세대들이 비건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확실히 자기 삶의 방식을 주도하는 친구들이 기성세대보다 많다. 여전히 소수이지만 이들이 앞으로의 사회를 잘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 새해 계획은.
"농장 사육 동물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동물의 고통 측면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나오는 폐기물 등 다양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다루기 쉽지 않은 주제고, 늦은 감도 없지 않아 있다. 프로젝트를 구체화 해 볼 예정이다."
그가 이어가고 있는 활동은 사력을 다해 가파른 산 정상에 올리지만, 아래로 굴러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보인다. 시선을 달리하면 바위가 굴러간 무수한 흔적은 다음세대가 걸어갈 길이다. 훗날 산 끝에 세워진 바위에 수많은 사람들의 손자국이 반짝일 날을 기대한다.